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짧은 문장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간절한 속삭임이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남과 비교당할 것이라는 불안감, 결과를 책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압박. '시험'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누구나 마음 한구석이 조여온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가 없다. 삶 그 자체가 연속적인 시험이기 때문이다.
진학과 취업, 인간관계, 자아에 대한 믿음까지-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시험대에 선다. 그런데 영어 단어 test의 어원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통찰이 열린다. 'test'는 라틴어 testum 또는 testa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고대 로마에서 금속의 순도를 확인하기 위해 사용하던 도가니 혹은 단단한 항아리를 뜻한다. 불순물을 태워내고 순수한 금속을 남기는 정련(精鍊)의 도구-바로 그곳에서 '시험'이라는 개념이 출발한 것이다.
즉, 시험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다. 뜨거운 불꽃 속에서 진짜를 드러내는 치열한 정화의 과정이다.
작년 5월, 아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중간고사 감독관으로 자원한 적이 있다. 교육자이면서도 보호자인 입장에서, 나는 그날 처음으로 시험장이라는 공간을 '인간적으로' 마주했다. 조용한 교실 안을 감돌던 적막, 간간이 대화가 오갔지만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시험지가 배부되기 전 한 학생이 유독 눈에 띄었다. 다리를 떨고 연필을 굴리더니, 머리를 감싸쥐고 연신 숨을 내쉬었다. 시험이 시작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갑자기 가슴을 킹콩처럼 치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교실은 금세 정적에 잠겼지만, 나는 시험지를 든 채 얼어붙었다. 학부모이자 교육자인 내게 그 장면은 잊을 수 없는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뇌리를 강하게 스친 말이 이것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 아이는 시험이라는 불의 도가니 안에서 스스로를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이 누군가에게는 숫자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으로 절절히 깨달았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자주 이 '도가니'를 떠올린다. 집중하지 못하던 아이가 어느 날 몰입하기 시작하고, 자신 없던 아이가 용기 내어 정답을 말할 때, 그 눈빛은 마치 불꽃 속에서 금속이 반짝이는 순간처럼 경이롭다. 아이들은 원석이다.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진짜 빛을 발하기 위해선 시험이라는 정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단순히 점수 매기기나 비교가 아니다. 시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가능성과 부족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하는 시간이다. 흔들리고, 실패하지만, 그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알아가고 단단해진다. 불편하고 아프지만, 그 안에는 성장이 숨어 있다.
이 과정은 어른에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AI와 변화의 속도가 가늠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간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정련'이 필요한 존재다. 선택의 순간이 늘어나고,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단단해진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 교육자와 부모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선생님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험이라는 도가니 앞에 선 아이들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자신을 잃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보는 조력자다. 흔들릴 때 기다려주고, 실패했을 때 일으켜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 정련은 뜨겁지만, 그 곁엔 섬세한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
시험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다. 성적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도전하는 힘이다. 영어 교육도 마찬가지다. 단어나 문법을 잘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두려움을 딛고 질문하는 힘, 실수를 통해 배우는 용기다. 스스로 말하고 표현하며, 자신만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는 힘-그것이 글로벌 시대의 진짜 역량이다.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이 이미 귀한 원석임을 잊는다. 시험이라는 숫자에 그들을 가두지 말고, 불완전함 속에서 가능성을 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9월 말에서 10월 초. 중고등학생들이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모두가 자기만의 도가니를 지나고 있다.
우리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그 불꽃 속에서 녹아내리지 않도록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 그 응원이 아이 인생에서 가장 오래 남는 빛이 될 것이다.